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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감았다. 다시 또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닫힌 창문을 열었다. 비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물을 창문에다 퍼붇는 듯 보였다. 창문은 흠뻑 젖어 있었다.

 

잠깐 사이에 소나기가 내렸나보다. 머리가 몽롱하다. 밤새 잠을 못 자서 그런지 기력이 없다. 겨우 힘을 내어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거실에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꽃들이 사진 액자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일년 전 가을밤을 담은 사진이었다. 비에 씻긴 청명한 가을밤이 너무 고요하고 맑아서 사진을 찍었던 걸로 기억한다. 활짝 피어난 꽃들과 가을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주제도, 메뉴도 없다. 흘러온 대로 흘러간다. 하늘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이 치더니 이내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입맛이 없어 그냥 식탁 의자에 앉았다.

 

양쪽에 피어있는 꽃들이 내 머리를 콕콕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두 눈에 푸른 빛의 꽃들이 가득 들어왔다. 시선이 향한 곳에 피어난 꽃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바닥을 뚫고 꽃이 피어 올라왔다. 길고 긴 꽃은 거의 천장에 닿을 듯했다. 꽃이 나를 찌를 것만 같았다. 꽃향기에 도취되었다. 꽃이 나인지 내가 꽃인지 모르는 몽롱한 상태에서 창가로 걸어갔다.

 

비가 춤을 추고 있었다. 비가 창문을 뚫고 들어와 나를 찌를 것만 같았다. 꽃이 잘 있으라며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젖은 창문을 천천히 열고 꽃이 뛰어내렸다.

 

꽃사슴의 운명이야기, 물이 많은 사주

 

"와줘서 고마워."

류는 마른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피곤에 찌들어 움푹 들어간 눈. 그의 두 눈에 담겨 있던 애처롭게 호소하는 듯한 살아있는 연약함은 공포와 불안과 시름에 자리를 빼앗겨 영롱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너무나 안쓰러워 차마 그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차가운 달빛이 비추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런데 그 죽음의 그림자가 두렵기는 커녕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침착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말수가 많지 않아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진실함과 따뜻한 인간의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이제 눈을 감아."

우리는 언제나 그곳에서의 삶을 동경했다. 몇 번 다녀오기는 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항상 떠오르고 그리운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그와 나는 그곳을 나비라고 부르곤 했다.

 

나비는 아무 때나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 항상 섬세한 준비가 필요했다. 나비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숨소리만 겨우 들릴 만큼 아주 고요한 곳이었다. 사실 아무 것도 없는 곳인데 모든 것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만감이 마음속 깊숙히 스며들곤 했다.

 

그는 나비에서 조금 적응이 되면 수행을 하길 원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곳에 들어가서 자신을 테스트해보고 싶어했다. 나비는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편안함보다 더욱 깊은 달콤한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꽃들이 살랑거렸다. 약간의 바람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흔들리는 모습이 그와 내 눈에 들어왔다. 꽃들이 우리를 반겨주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다.

 

"네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는 나의 검은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밤바다의 물결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밤바다는 고요하게 젖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눈가 주변을 톡톡 두드린 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왠지 모를 슬픈 만족감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

 

"미주 네가 바다에 누워 있으면 정말 빛날거야."

"그렇게 있으면,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를텐데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가슴 속 깊이 바다를 품고 있었다. 바다는 언제나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으므로 바다의 고요하고 부드러운 물결이 온종일 자신을 감싸 안아주었으면 좋겠다며 간절히 바라곤 했다.

 

"이미 바다가 곁에 있으니 괜찮아."

그가 좋아하는 은빛과 푸른바다가 아닌 검은 바다였지만 그는 어둠 속 물결이 보이지 않기에 도리어 자신을 더욱더 자유롭게 해주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그는 물의 기운이 가득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감정적으로 깊이 빠지는 일이 많았다. 고요한 바다처럼 언제나 차분하고 고요하고 맑은 만족감으로 채워주는 아름다운 물결같은 남자였다.

 

"네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라 젖어 있으면 그 눈물은 마치 파도처럼 느껴져. 그것은 고요한 파도이기도 하고 때론 성난 파도처럼 무섭게 돌변하기도 하지."

 

"자, 봐봐. 너의 눈은 정말 신비로워. 물의 기운이 가득 차 있는 듯해. 너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눈이 젖어드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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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닷속처럼 보이지 않기에 더 자유로운 기분이 들어. 때론 너무 드러내는 것보단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더욱 아름다울 때가 있지. 그게 바로 너야."

 

수가 많은 사주

 

"자, 이게 이번 생에 네가 부여받은 임무야."

"내 사주에 물의 기운이 이렇게나 많아요?

"그래. 물의 기운이 유난히 많이 흐르고 있지."

"이런 사주는 일반적이지 않은 편인가요?"

"보기 드문 사주지. 네 사주를 보고 있으면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너와 나,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 서로 따로 떨어져 있고 별개의 존재인 것 같지만 사실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어. 네가 바라보는 것을 내가 바라보고 있고 내가 느끼는 것을 너도 함께 느끼고 있어. 나는 흘러서 너에게 가고 너 또한 흘러 나에게 온 거지. 또 우리는 함께 흘러 다른 누군가에게, 다른 세계에 다다를 수 있어."

 

"네가 얼마나 맑고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을 주는지 너는 알고 있니? 나의 물결은 너를 항상 들뜨게 하고 너의 검은 눈동자는 나를 맑게 비추고 내가 힘들 때 복잡한 내 머릿속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 같아."

 

나는 그동안 슬픔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지 못했다. 그저 마음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처럼 다가온 류는 내 마음속 깊은 슬픔을 어루만지고 바다의 물결과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흘러가게 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 억지로 흐름에 저항하지도 말고. 네가 타고난 그 영롱한 검은 눈동자처럼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봐. 미주 넌, 네가 얼마나 맑고 순수한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지저분하고 타락한 모든 것을 네가 가진 청량함으로 깨끗하게 씻어내고 있다는 걸 잘 모르는 듯해."

 

"용기를 잃지 마. 언제나 항상 너의 맑은 물결을 잃지 않도록 내가 네 곁에 있을게."

나는 류의 말을 듣고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세차게 내려와 창문을 때리던 비는 어느 새 잦아들어 고요해져 있었다. 조심스러운 듯 문을 톡톡 두드리는 빗소리는 내 마음을 고요하게 두드렸다. 나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꽃들이 좌우로 흔들리며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두 눈이 젖어 눈물이 넘치고 흘러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눈물의 얼룩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눈물은 내 마음속 깊이 담겨 있던 슬픔이다. 상처와 아픔의 흔적이다. 내 마음을 할퀴고 흠집을 내는 불순한 악의 같은 것이 떨어져 스며들고 있는 눈물의 얼룩으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나는 애처로운 눈으로 눈물의 얼룩을 바라보며 회한과 미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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