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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

꽃 한송이의 작은 북(鼓)

by 꽃사슴 2021.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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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송이의 작은 북

 

꽃 한송이의 작은 북

 

작은 북에다가 꽃을 그려넣었다. 품 안에 있는 북을 들어 꽃을 한송이, 한송이 정성스레 그렸다. 전에는 그림도 무늬도 없이 텅 비어있는 모습이었는데 모처럼 기분이 나서 이렇게 꽃을 그려넣으니 늘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북처럼 보이질 않았고 선물을 받은 듯 새롭고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북을 두드릴 때 예전에 나던 소리와는 조금 다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손으로 북을 두드릴 때마다 들려오던 소리가 평소와 같지 않고 꽃을 그려넣은 이후부터 어떤 알 수 없는 영롱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옆에 앉아 함께 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는 미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손에 들고 있는 북을 기묘하다는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북에게서 멀어져갈 때쯤, 시계는 밤 12시를 알렸고 미호와 나는 시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 있는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은 밤 숲 속에 들어간 미호와 나는 단단히 묶은 검은 머리를 풀고 걸음을 멈춘 곳에 앉았다. 미호는 큰 가방 안에 넣어둔 작은 북을 꺼내 들었다. 곧바로 나도 가방 안에 들어 있던 꽃을 그려넣은 작은 북을 꺼내 두 손에 들고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뱉은 후 손으로 조심스레 작은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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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 퉁. 북을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두드릴 때쯤 얼굴에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숲 속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투두둑 작은 북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던 미호는 북을 연주하니 바로 감응을 얻은 것이라 생각해 감복한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곧이어 빗줄기가 거세지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미호와 나는 비를 피하지 않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작은 북을 두드렸다.

 

북을 두드릴 때마다 머리와 마음 속에 강하게 닫혀 있는 무언가가 활짝 열렸고 이내 몸 속으로 비가 스며들었다. 비릿한 비 내음, 비에 젖은 나무와 비를 머금은 흙냄새가 났다. 미호와 나는 내리는 비에 맞춰 북을 두드렸고 북을 연주하는 것인지 북이 나인지 모를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북을 두드리며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비 내리는 숲 속에 앉아 눈을 감고 한참동안 북을 두드리다가 두 눈을 뜨고 작은 북을 보니 북에 그려넣었던 꽃그림이 바래져 남아있는 꽃잎 한 잎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가을바람이 비내음과 섞여 불어와 우리의 연약함과 간절한 마음을 어루만지듯 얼굴을 간지럽혔고 미호와 나의 검은 머리가 젖은 채로 바람에 휘날렸다.

 

두 눈을 살며시 뜨고 미호를 바라보니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북을 바라보니 어느새 영롱한 눈망울에 맺힌 눈물 사이로 나의 작은 북 위에 남아있던 마지막 꽃잎 한 잎마저 사라져 버렸다.

 

- 2021 辛丑年 丙申月 己亥日 꽃 한송이의 작은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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